6월항쟁기념사업회에서 계획하고 있는 민주시민교육 준비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교육내용이 준비되어 있고 준비모임에 가면 강사로서 교안을 교육받고 나서 학생들 앞에 서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모임에 가보니 교안에 대한 준비도 함께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었다.

87년 6월 항쟁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때 나는 고려중학교 3학년이었다. 이웃한 고려고등학교 운동장이 며칠 째 소란스러웠던 어느 날, 우리도 뭔가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생겼다. 우리는 거사일을 정하여 점심 도시락을 까먹은 교실의 문을 안쪽에서 모두 잠그기로 했다. 모두 책상위에 엎드리고 5교시 수업을 거부했다. 우리가 수업거부를 통해 학교와 교사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는 매우 간명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우리를 때리지 마라"

그때 길위에 선 어른들의 민주주의가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였다면, 1987년 6월에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때리지 마라'였다. 내 기억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본 반항이었다. 집요하게 반장 한 명만을 불러대며 문열어라를 외치던 선생님에게 굴복하여 배신을 택한 반장이 문을 열었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책임자를 색출하여 때리지 않았고, 아무 일 없던 듯 수업을 했다. 그 수업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구타없는 수업이 짜릿했다는 것은 온전히 기억난다.

87년 6월항쟁은 직선제 쟁취만 남긴 것이 아니라 이렇게 까까머리 학생들에게도 민주주의를 심어놓은 것이다.

2016년 10월에 시작한 촛불항쟁도 어떤 이들의 삶에 민주주의의 불씨를 전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부패한 대통령을 끌어내린 것보다 그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만 나는 그 불씨중 하나가 여성주의였다고 생각한다.

그때 집요하게 반장을 호출하여 우리들의 농성을 무력화 했던 그 선생님은 2년 후 그 학교에 교직원노동조합이 생겼을 때 노동조합에 가입했었다. 그는 조합으로서 꽤 견결하게 싸웠다. 그는 가장 아프게 우리를 때리던 교사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87년부터 싹튼 학생자치운동은 보다 더 넓은 광장의 민주주의와 함께 동행하여 성장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갈등했다. 그 동행과 갈등이 모두 학생자치운동이나 청소년운동, 민주화운동의 성장에 꼭 필요한 것이었듯, 여성운동의 어떤 면이 광장의 민주주의와 동행하기도 하고 갈등하기도 했던 과정은   결과적으로 우리를 더 큰 민주주의로 이끌 것이라고 믿는다.

어제, 민주시민교육 준비모임을 하면서, 성소수자위원회 준비위 당원들과 함께 '바비를 위한 기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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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경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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