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대학교의 역사

자료 2018. 10. 3. 08:51
<어제 정의당 광주광역시당 동구위원회가 주최한 조선대학교 발전방안 토론회에서 김동규 청년학생위원장이 발표한 조선대학교의 역사 발제문입니다. 1946년 당시 광주시 인구가 10만명이었는데, 무려 7만2천명의 시도민이 참여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클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설립한 대학이 조선대학교입니다. 박철웅 일가의 사학지배로 피폐해진 조선대학교를 다시 민립대학 정신으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던 가운데 정부가 공영형 사립대학 육성을 통해 공동학위수여 제도를 도입하고 우리사회의 뿌리 깊은 학벌문제를 해결할 단초를 마련하겠다 약속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지켜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선대학교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조선대학교의 역사가 너무나 잘 설명하고 있어서 공유합니다.>

#조선대학교의_역사

 조선대학교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1920년대를 풍미한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된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19년 3월 1일. 그간 억눌려있던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적인 식민지배에 대한 반발이 터져나왔다. 조선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만주까지 확산되었으며 동아시아의 역사에도 깊은 흔적은 남겼다. 일제는 3.1운동을 목도하고 조선을 강압적인 방식만으로는 통치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에 무단통치 노선 대신 문화통치 노선을 채택하였다. 3.1운동이라는 민족적 참화이자 열망의 분출로 1920년대를 맞이한 조선에서는 독립을 위한 다양한 노선들이 검토되었다. 역사적으로는 무장투쟁노선과 실력양성운동의 큰 줄기로 구분되는 노선들이다.

 이중 실력양성운동은 민중들이 스스로 힘을 길러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었다.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운동 등이 맹렬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실력양성운동 중 하나가 바로 민립대학설립운동이었다. 1920년 6월 23일 이상재 등의 주도로 ‘조선교육회’가 출범하였으며 학교 증설과 조선인 교육을 위한 흐름을 주도하고자 노력했다. 일제는 ‘내선공학‘을 내세워 국립대학 설립을 주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도쿄제국대학, 쿄토제국대학, 경성제국대학과 같은 일본 제국주의의 대표적인 엘리트 양성기관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에 맞서 1922년 11월 조선교육회의 이상재등을 비롯한 각계인사가 모여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조선민족 한 사람 당 1원씩“이라는 구호 아래 1천만원의 설립기금 모금을 결의하였다. 민립대학기성준비회의 조직이 확대되자 일제는 이들에 대한 탄압을 진행하였으며 서둘러 조선제국대학창설위원회를 구성하여 경성제국대학의 설립했다. 일제의 탄압도 주요한 요인임이 분명했으나,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지닌 자체적인 한계 역시 이 운동을 난관에 부딪히게 했다. 추진한 모금액은 100만원에 미치지 않았으며 민중의 다수가 보통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기 위한 움직임에 대한 반발 역시 분명히 존재했다. 결국 1923년 이래의 수해와 가뭄까지 맞물려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듯 민립대학설립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조선민족의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열망만은 많은 사람들에게 남게 되었다. 이는 일제의 폭압이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종결된 후 해방과 새로운 국가의 건국을 사이에 두고 터져나온 해방정국에서 다시금 역사에 등장하였다. 1946년 9월 조선대학교 설립동지회는 새로운 국가 수립에 기여할 지역 사회의 인재를 양성한다는 명분 아래 유래 없는 대중적인 참여를 이끌어냈다. 무려 7만 2195명이 조선대학교 설립동지회에 참여한 것이다. 당시 광주지역의 인구가 불과 10만여명이었음을 생각할 때 광주와 호남을 넘어 전국적인 민중들의 참여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7만 2천명이라는 압도적인 대중적인 참여로 인한 대학설립은 현재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200여개의 대학교의 설립배경을 모두 살핀다해도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뜻깊은 일이었다.

 이렇듯 조선대학교는 개인이나 국가가 아닌 다수 대중의 지지와 성원을 바탕으로한 민중적인 기반을 통해 민립대학으로 역사속에 태동하기 시작했다. 돈을 모아 영화를 만들고 다양한 사회적인 행위들을 하는 크라우드 펀딩의 방식으로 종합대학을 건립하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금자탑을 새긴 셈이다. 그러나 이같은 위대한 설립정신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선대학교 설립동지회가 7만여명의 시민들로부터 모금받은 현물이 상당한 양이었는데, 당시 전남도지사를 역임했던 서민호는 전남도청 운수과장을 맡고 있던 박철웅에게 현물처리를 요청하였고 이로써 조선대학교는 대학교육기관으로써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물처리 등으로 상당한 역할을 했던 박철웅은 설립동지회의 중심 인물들을 배제하고 조선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이후 학교는 그에 의해 철저히 사유화되기 시작했다. 민중이 설립한 민립대학이 사립대학으로 변모하는 과정이었다. 어느새 6.25 전쟁을 거치며 설립동지회는 자연스럽게 해소되었고 박철웅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1980년대까지 조선대학교 사유화한다.

 이 땅의 역사가 그러했듯, 1980년까지 조선대학교는 소수의 권력자들에 의해 움직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잠시나마 물러나게 한 것은 1980년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군부였다. 신군부는 광주보안대로 박철웅을 압송하여 학교운영권을 일시적으로 박탈했다. 1982년 11월에야 복귀했으며, 이후 박철웅은 시국선언을 주도하는 일이 빈번하자 모든 교수들을 매일 운동장에 불러모아 출석을 부른 후 아침구보를 시키고 훈시를 하는 등 독단적인 대학운영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행태가 워낙 유명하여 시인 고은은 만인보 10권에서 박철웅이라는 동명의 시를 발표하여 이러한 행태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박철웅>
해방 직후 이 고장 사람들이
쌀 한 되
보리 한 되 내놓아
그야말로 향토의 민립대학으로 문을 열어
젊은 이돈명이 제1회 졸업생이었던가
그러다가 조선대학교는
총장도
이사장도 박철웅이었습니다

바야흐로 조선대학교는
박철웅의 나라였습니다 하오리 입었던 야망의 나라였습니다

전체 교수 다 운동장에 모여라
체력단련이다 체력이 약하면 정신력이 약하다
한 바퀴 돌아라
두 바퀴 돌아라
아닌밤중에 육군 신병훈련소였습니다

어느덧 그 조선대학교도 지나쳐
답답한 김포공항에 내리는 시각입니다

 이렇듯 박철웅 개인의 독단적인 운영은 당대의 한국사회가 군부독재 세력에 의해 독단적으로 운영되었던 행태와 매우 유사하였다. 이에 1987년 6월항쟁이 터져나왔고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요구되었듯, 조선대학교의 민주화를 외치는 목소리도 터져나왔다. 1987년 8월 5일 박철웅의 비서가 조선대병원장을 공식석상에서 폭행하는 사건이 단초가 되었다. 학생들은 이사진 퇴진을 요구했으며 9월 17일부터 농성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농성은 시민들과 학부모들의 가세로 장기화 되었고 1988년 1월 8일까지 113일간 이어졌다.

 당시 반독재투쟁과 맞물려 전개되었던 조선대학교 점거농성은 1988년 1월 8일 새벽 4시에 공권력의 투입에 의해 막을 내렸다. 그러나 문교부는 조선대학교에 대한 종합감사를 실시하여 박철웅 총장과 기존의 이사진들을 해임하였고 위의 시에도 언급되는 이돈명이 1988년 9월 29일 조선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학원민주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민립대학으로 설립되어 사립화의 전횡을 겪었던 조선대학교는 다시금 시민의 대학으로 거듭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2007년 1.8 항쟁은 학교의 공식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이르기 까지도 조선대학교에 구 재단측이 행사하는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였다. 민립대학 정신의 계승은 여전히 요원한 일로 평가되고 있었다. 이러던 중 2010년 진보신당의 광주시장 후보로 출마한 윤난실은 “조선대학교를 시립대학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조선대학교 조선대학교 동창회의 조환종 회장, 오병인 이사장, 김명현 사무국장 등의 회원들은 성명을 발표하고 “조선대학교는 1946년 고 박철웅의 교육철학과 건학정신을 내걸고 개교한 대학”임을 선언하고, “설립재단의 공적을 제쳐 놓고 시립 대학화를 공언한 것은 조선대학교 전 구성원을 모독하고 선량한 시민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발표했다. 이들은 “조선대학교의 설립 역사를 모르는 무식한 진보 신당은 해산하라”는 주장까지 내어놓았다.

 이렇듯 조선대학교는 형식적인 학내민주화를 달성한 상황에서도 ‘구재단’으로 통용되는 토호적폐세력의 잔당들의 영향력에 의하여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집권한 이후 “공영형 사립대“를 핵심 공약으로 추진하면서 변화의 갈림길에 들어서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민립대학을 원하는 시민들의 헌신으로 설립된 조선대학교가 이제는 민립대학의 정신에 걸맞는 공영형 사립대학으로 거듭날 길은 아직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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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경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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